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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딩 온 프레임 /기억/문자/의식

블렌딩 온 프레임 /기억/문자/의식

전 시 명 블렌딩 온 프레임 /기억/문자/의식
전 시 기 간 블렌딩 온 프레임 /기억/문자/의식
전 시 장 소 루시다 갤러리
( 경남 진주시 망경북길 38, 055-759-7165, )
주 최 사진진주2019

1. 전시를 열며
Opening the exhibition

'blending'은 하나 이상의 것들을 섞는다는 윤리적이고 화학적 개념으로 출발하였다. 이를 문화적 층위로 이해한다면 아마 융합 혹은 혼효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번 진주 사진제의 주제인 ‘blending'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 중 하나인 중심의 해체 혹은 매체의 융합 정도로 해석된다. 특히 사진 매체는 노에마의 견고성으로 말미암아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적 대상으로 활용되어온 가장 탁월한 매체였다. 한국 사진에서는 이러한 담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새시좌전’(1988, 워커힐 미술관)으로부터이다. 이후 ‘한국 사진의 수평전’을 통해 보편적으로 확장되었지만, 더 넓은 확장성과 깊이 있는 담론 형성의 동력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 이 사조는 돌풍처럼 우리 사진계 안으로 다가왔다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느끼기 힘든 현상이 되었다. 그것이 주는 철학, 문학적 의미에 대한 숙고나 이 사상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깊이 있게 다루어 보지 못한 채 유행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현대사진이란 이름으로 부유하곤 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근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철학적 성찰, 서구의 체계를 벗어나려는 탈식민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후기 산업사회, 후기 근대 다원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우리 삶의 지평 전체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시각예술의 경우 사실주의의 재현에서 장르의 순수성으로 이어져온 반발의 결과물이었다. 특히 사진에서는 단 하나의 재현이라는 신화와 전통을 거부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재현을 넘어서는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모더니즘이 확립해 놓은 형식에 대한 거부 및 반작용으로, 탈근대주의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울산의 사진단체 <섬과 물결>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비전업 아마추어 작가들이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삶의 구조를 탐구한다. 더불어 매체의 형식을 실험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각자의 작업에 반추하기도 한다. 결국 그들의 작업은 근대 사진의 한계를 토대로 현대성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사진의 근원적 속성인 프레임을 주된 형식으로 활용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진에서의 프레이밍은 사물을 이미지로 전유하여 자신과의 특정한 관계를 맺는 행위이자 대상을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다. 한 장의 프레임 속에 모든 미적 요소가 결집되는 걸작 주의는 근대 사진의 표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근대성을 벗어나기 위한 탈프레임 운동은 사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전략으로 활용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프레임을 통해 둘 이상의 언어 형식 중 어느 일부를 취하거나 혼합하여 정상적인 문법을 해체한다. 혹은 탈프레임을 통해 사진의 뿌리, 토대, 그 자체를 전복시켜 코드화된 일체의 규범을 해체하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사진의 새로운 언어를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맹목적 추종이나 본능적 거부로 인해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하였던 아마추어 사진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제안하기로 한다.

2.

모더니즘 사진은 매체의 특성으로 인해 객관성을 담보한 기록성을 공적 가치의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겼다. 그래서 잡지의 발전과 더불어 사진 도큐멘테이션이 활발했던 시기를 사진의 황금기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이 프레임 속에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조형성을 구현해내는 ‘결정적 순간의 사진’이 여전히 우리에게 고전인 이유이다.
김남효, 김병욱은 이러한 사진의 전형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지고 발전해 나가는 도시라는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 또한 그 공간을 기록하는 태도의 자세, 등이 그렇다. 동일한 행정 공간을 시차를 두고 촬영한 김남효의 ‘도시를 걷다’는 급변하는 도시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성찰한다. 산업화와 더불어 급격하게 변모하는 도시의 변화 속에 부유하듯 떠도는 기표들을 날 것으로 기록해낸 그의 메시지는 인간이 ‘특이성의 장’안에 있음을 환기 시킨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어떤 경기의 승패가 정해져 있더라도 경기 시간 동안의 틀 안에서 구체적 차이 혹은 방식에 주목하자는 메타포로 읽혀진다. 또한 근 현대적 공간과 존재를 교차 시키는 프레임의 구성을 통해 실재성의 개념을 변화 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 교차된 프레임은 우리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이 붕괴되어 가는 지금,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거점은 결국 ‘만남과 기록’임을 증명한다.

3.

김병욱의 ‘삼산포’는 두 도시 공간을 자신의 기억 속 장소(성)으로 치환한다. 삼천포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생활하는 작가는 두 도시를 넘나들며 특수한 공간에서 장소(성)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성장하면서 결정된다는 주체 주의 관점에서 그는 양쪽의 도시공간 어디에도 실존하지 못하는 경계인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의 이중적 언어이며 장소화된 공간의 혼효 이미지이다.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된 프레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누구나 익숙한 익명의 도시 ‘삼산포’로 재맥락화된다. 이 익명의 도시는 도시 문명의 획일성, 개발을 통한 지역의 역사성 부재의 모순에 대한 이미지이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지금 이곳에서만 기록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자기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이며 나아가 그에 대한 해석과 태도 결정이 전제한다. 지금 이곳이란 시공간을 떠난 사진은 본래적 의미에서 다큐멘트 사진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다큐멘트 사진은 자기 정체성을 문제 삼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삼산포’는 도시 문명의 획일성, 근대적 합리성이 개인 김병욱의 장소(성)에 가하는 폭력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다.

4.

이영국이 기록한 사진공간은 도시와 농촌의 중간지점에 있다. 그리고 그는 흑백과 컬러의 두 프레임을 병치시켜 기존 프레임의 문법과 차별화시킨다. 이영국은 자신의 생존과 일상이 켜켜이 쌓여있는 ‘동네’라는 이곳이 어느 날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적된 추억의 온기는 사라지고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그곳. 스스로 주체가 되어버린 정체 없는 컬러들, 하늘을 가린 채 권위를 자랑하며 서 있는 각종 표지판. 이영국은 불현 듯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이 낯선 풍경들에 당황해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사진이라는 차가운 기계 매체를 통해 냉정한 관찰자로 변신한다. 70년대의 지형학 사진과 뉴컬러 프로젝트가 그랬듯이 무미건조한 중성적 태도로 그는 ‘동네’를 기록했다. 서구의 중성 미학은 자연에의 정복을 선언한 결과론적 풍경에 대한 거대담론이었다. 하지만 이영국의 ‘중간지대’는 진보와 성장, 이성의 승리와 함께 보편 원리로 치장된 근대화를 상징하는 개발 도시에 대해 침묵의 저항이다. 기능과 실용성이 극대화된 우리 사회체계의 풍경은 그의 반 원근법적 프레임으로 차갑고 금욕적인 공간으로 제시된다. 이로 인해 그의 ‘동네’는 카뮈의 이방인처럼 태양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떠있는 시간, 그 건조한 시간에 그와 마주한다.

5.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전략은 모더니즘의 순수성에 대한 공격이자 세련된 형식주의 비판이다. 모더니즘에서 예술이란 미적 관조가 이성의 최고 행위의 승화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진에서 텍스트는 이러한 미적 관조를 해체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개념예술에서는 하나의 미학적 장치로 정착되었다. 한규택의 ‘점 프로젝트’는 현대사진의 변화 그 중심에 있는 디지털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모더니즘 사진의 근원이 입자에서 비롯된다면 디지털은 픽셀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픽셀은 조작이 가능하다. 그로 인해 이미 사진은 진실을 복제하는 신화를 배신한지 오래이다. ‘점 프로젝트’는 우주의 삼라만상은 점으로 시작되고 압축과 팽창에 의해 세상이 존재한다는 그의 우주론적 사고로부터 착안되었다. 한 장의 풍경 같은 이미지는 수많은 이미지를 겹겹이 겹쳐서 만들어진 혼합 이미지이다. 이것은 확률로 존재하는 막(레이어)들이 겹쳐져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그의 생성 존재론적 관점을 이미지로 구현한 결과이다. 그 이미지는 가시거리를 좁혀가면 풍경이 사라지고 이미지의 최소 단위는 텍스트로 남게 된다. 이 텍스트는 결국 세상의 각기 다른 레이어(세상)를 연결하여 표출하는 매개로 작용된다. 또다시 가시거리를 확보하는 순간, 빛의 삼원색으로 탈맥락화 되는 이미지. 결국 한규택은 디지털 사진의 무한한 가능성과 사진의 본질, 나아가 빛을 통해 존재의 근원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상일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오월항쟁 중에 촬영된 그의 필름들은 그의 저작권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이미지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숨 가쁘고 치열하게 흘러갔던 그날들의 기억을 토대로 이미지 없는 텍스트로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그날의 긴장의 시간들을 과연 텍스트는 어디까지 진술할 수가 있을까? 당시 저널에 종사했던 기자의 기록들과 그가 촬영한 사진들은 서로의 입장과 목적이 대척점에 있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기록사진과 그의 텍스트가 더해져서 우리는 그 역사가 가진 현장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렇듯 두 작가는 탈프레임을 통한 사진

6.

사진은 시각 원근법이라는 근대의 문명을 토대로 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사유 주체인 인간의 합리적 계몽을 위한 공적 매체의 중심으로 활용된 계기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사적인 기록의 영역, 개인 욕망의 표현 매체로 사진이 활용된 시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도부선과 배은희의 사진은 근대성이 요구해온 가치관인 완벽한 형식, 보편적 가치 등의 걸작주의에서 상당 부분 멀어져 있다. 이들은 근대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존재론적 동일성에 대한 차이와 반복을 강조한다. 일원성에 대한 다원성의 탐색으로 자신의 내면과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도부선은 자기의식의 작용이 어떻게 대상을 구축하는지에 대해 프레임으로 실험한다. 그녀는 뿌리식물 들의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얽혀 맺어가는 관계처럼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의식에 대해 사진으로 숙고한다. 그녀가 프레임으로 전유한 자연 풍경과 일상 속 오브제를 차이와 반복으로 지속시키는 동력이 바로 이렇게 숙고한 다층적 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 ‘노에시스’를 통해 환영과 실재,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 심지어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도부선은 자유롭게 여행한다. 이렇게 풍경과 사물이 원래의 시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형성하는 프레임의 유희는 그녀의 심연 속에 자리한 리비도의 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7.

배은희는 고전적 카메라를 이용해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을 전치시켜 그녀의 의식을 탈맥락화한다. 그것은 곧 그녀의 잠재된 반의식의 누설이기도 하다. 배은희의 ‘은닉된 일상’ 속 사물들은 이성과 감성, 시간과 공간 나아가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조적 경계마저 모호하고 애매하다. 이렇게 탈맥락화 된 사물들의 조합인 불일치와 불투명성은 이 시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삶의 모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배은희는 두 프레임이 하나로 프레임화되는 하프카메라를 이용해 고정관념으로 은닉된 이분법의 틈새들을 성찰해 왔다. 그리고 나아가 그녀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존재의 근원이자, 혼돈과 가변성의 지대인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영역까지 도달하기에 이른다. 모순적이고 대립적으로 재구성한 그녀의 이미지는 결국 의식과 반의식, 실존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경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약하자면 사물을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에 대한 사물 존재와의 상호 관계성이자, 배은희 자신과 세계와의 은닉된 행간이다.

사진의 중간계층인 이들의 다양한 작업 태도는 한국 사진의 중요한 자산이다. 이들의 작업은 결국 완결성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내면을 응시한다. 기존의 문맥과 문법으로는 현대의 다층적 의미를 구현 함에 한계에 직면하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 그 열정 있는 중간층의 새롭고 신선한 차이에 대한 감각, 미완성의 여백과 행간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낸다.